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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가상거리에서 생긴 일

IT문화원 컬럼. 1996년 01월 01일. [갈래: etc] URL: http://www.dal.kr/col/etc/19960101_root_w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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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와 날개 1996년 1월호 (글: 김중태)


오늘은 승진시험을 보는 날. 첫번째 시험은 운동신경을 측정하는 격투기다. 사원들은 모두 시험장에 들어와서 오른쪽 귀 뒤의 입력구멍에 가상현실조정단자를 연결하고 눈을 감았다. 이어서 감독관이 시작단추를 누르자 눈 앞에 가상격투기장이 펼쳐진다. 언제나처럼 강한돌씨는 컴퓨터가 만든 가상인간에게 엄청 얻어맞았다. 도대체 운동하고는 친하지 않은 사람이다. 격투기를 시작으로 하여 개인용날틀이 조종까지 열 종목의 체력장시험과 과목시험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피곤하고 노곤노곤하다.

이런 날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퇴근 후에 강한돌씨는 같은 회사 동료이자 친한 친구인 노가리씨를 만나 주절대기 시작한다.

"야야, 정말 옛날이 좋았다니까. 그때는 가상격투기를 하면서 상대편에게 맞아도 통증을 느끼지 않았잖아. 그래서 운동 못하는 나도 격투기를 취미생활로 즐길 정도였는데, 뇌파를 조정하는 방법을 도입한 이후로는 가상현실에서 맞아도 고통을 느낀단 말야. 물론 멍이 들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어쨌든 빌어먹을이다."

"대신 가상섹스를 할 때도 실제로 하는 것과 똑 같은 쾌감을 느낄 수 있잖아."

"그럼 뭐 하냐. 옛날에는 잘 생긴 얼굴을 선택해서 가상거리에서 놀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놈의 가상현실조정기를 뇌에 연결하는 바람에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 옛날과는 달리 조정기가 유전자정보를 판독해서 내 모습을 그대로 실체화하니 어떤 여자가 나처럼 볼품 없고 나이 든 남자랑 사귀려고 하겠냐."

"후후. 대신 옛날에는 여자도 전부 가면 쓴 미녀만 있어서 꼭 로보트하고 노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제 모습으로 들락거리니 헌팅할 때 한결 더 사실감 있고 긴장감 있어 좋잖아. 아참 이럴게 아니라 모처럼 여자 꼬시러 가상거리에 들어가보자."

"들어가봐야 어떤 여자가 쳐다 본다고. 나는 싫다. 잘 생긴 너나 들어가라. 그리고 너는 총각이니까 자유롭게 살지만 내 마누라가 알면 내 목이 남아나지 않을거다. 지난번에도 가상거리에서 여자 꼬시다가 아내 친구가 보고 고자질하는 바람에 엄청 혼난 것 알잖아."

"내가 또 누구냐. 너를 위해서 길을 마련해두었다. 이번에 산마루의학회사에서 양방향통신뇌수술을 한 사람들에게 통신회사의 협찬을 받아 하루 동안 유전자정보변경서비스를 해준다고 하더라. 그럼 예전처럼 자신이 원하는 멋진 남자의 탈을 쓰고 가상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지."

"앗? 그게 정말이야? 그 수술은 나도 받았지만 그런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몰랐네. 야 그럼 빨리 들어가보자."

"그럼 먼저 너 아내한테 연락해서 조금 늦게 퇴근한다고 적당한 핑계를 대라. 너 아내는 너가 뭐 하고 있나 자주 확인하잖아."

"아, 그거라면 걱정 안해도 돼. 내 아내는 며칠전부터 어느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하느라고 정신 없거든. 지금도 근무 때문에 정신 없을텐데 뭐. 덕분에 요새 며칠은 여기저기 아내 감시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가상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럼 어디에서 접속할까? 사무실에서 하는게 안전하겠지?"

강한돌씨는 노가리씨와 함께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서 가상현실조정기를 뇌에 연결했다. 곧 두 사람의 허상은 가상거리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볼까?"

"얼마전에 문을 연 배꽃거리가 요즘 가장 물이 좋다고 하더라. 그쪽으로 가보자."
노가리씨가 배꽃거리의 가상주소를 입력하자 곧바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내리자 문은 잠시 닫혔으나, 곧 다시 열리면서 끊임 없이 사람을 토해냈다.

"우와 이 거리에 무척 많은 사람이 접속하는데."

"정말 그렇군. 확실히 여기가 물이 좋은게 분명한 것 같다. 자 그럼 괜찮은 만남을 위해서 움직여 보자고."

잘생긴 남자로 가면을 쓴 덕분에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짝을 찾을 수 있었다. 카페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에 의기투합한 두 쌍은 바로 호텔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호텔로 향하는 네 사람. 강한돌씨의 표정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나 네 사람을 가로막더니 강한돌씨를 노려본다.

'으헉? 아니 이럴 수가? 아내가 여기에 어쩐 일로 온거지?'

순간적으로 크게 놀랐으나 자신이 남의 얼굴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진정시켰다. 강한돌씨가 태연한 모습으로 옆을 스쳐가는 순간 아내가 강한돌씨의 팔을 덥썩 붙잡았으며 한 마디 했다.

"흥! 가증스럽게 남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바람을 피워?"

"아니?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사람 잘 못 본 것 아닙니까?"

"호호호. 얼굴 바꿨다고 태연스럽게 발뺌하는 것 좀 봐라. 당신 내가 어디에서 아르바이트 하는지 알아? 흥 집에 관심이 없는 당신이니 아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지. 산마루의학회사에서 고객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게 바로 나야. 서비스신청자 명단에 당신 이름이 있기에 뭐 하나 봤더니 딴 남자 얼굴로 바꾼 뒤에 배꽃거리에 와서 바람을 피우고 다녀. 아이고 이 화상아. 당장 접속 끊고 집으로 들어오지 못해."

깜짝 놀란 강한돌씨는 얼른 조정장치를 끄고 옆의 친구를 바라봤다. 노가리씨도 어느새 조정장치를 끝내고 가상거리의 접속을 마친 상태다.

"으아. 이제 큰일 났다. 어떡하지? 오늘밤엔 진짜 격투기가 벌어지겠는데. 가상현실에서 인조인간하고 싸운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고통스럽겠지? 무슨 방법 없을까?"
노가리씨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위로를 할 뿐이다.

"글쎄. 이번에는 나도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없겠는데. 현장을 들켜버렸으니. 조금 고통스럽지만 아내한테 맞더라도 그저 비는 수밖에."

"그래서 옛날이 좋았다니까. 옛날에는 무조건 딱 잡아떼면 됐지만 지금은 기록이 남으니 발뺌도 하지 못하고.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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