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해도 디지털 기기를 주변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숫자로 표시되는 액정시계는 쉽게 볼 수 있지만 PC처럼 고급 기능을 가진 디지털 제품은 일부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고가의 장비에 속했다. 이런 상황은 10년 만에 크게 바뀌었다. 생활 전 분야에서 디지털화가 진전된 것이다. LP판과 테이프의 아날로그 매체는 디지털 방식인 CD를 거쳐 MD, MP3, DVD 등으로 진화했다. 필름 카메라는 디지털카메라로 바뀌었고 비디오테이프도 DVD로 바뀌는 중이다. 대부분의 매체가 디지털화 되면서 아날로그의 자리는 점차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화가 가속화되면서 디지털 관련 직종이 첨단 직종으로 자리 잡았고 수 많은 디지털 관련 직종이 생겨났다. 디지털화가 되면서 산업 지배구조나 직업의 근무 형태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온라인 서점이 등장해 서점의 지배구조를 바꾸고, 게임 강국인 일본에 온라인 게임으로 한국 게임업체가 진출하는 중이다.
반면 아날로그 직종은 점차 자리를 잃고 있다. 손으로 그리던 만화영화는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한 플래시 애니메이션이나 3D 애니메이션에 밀리고 있다. 예전처럼 원화부에서 그린 그림에 색을 입히고 배경과 합성하는 작업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에 따라 경쟁력을 잃는 곳이 있는 반면 경쟁력을 새롭게 가지는 곳이 생긴다.
컬러 작업을 예로 들자. 컬러 부분은 우리나라 만화영화가 일본에 크게 뒤졌던 부분이다. 블루시걸 같은 국산 만화영화를 보면 주인공 얼굴이나 옷 색이 매번 다른 색으로 나오는데 이는 물감을 제대로 조합하지 못한 결과다. 일본은 꼼꼼하게 기록한 자료를 이용하여 특정색을 만들기 위한 물감의 조합 비율을 모두 수치로 기록해두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물감을 조합해 얼굴색을 만들더라도 늘 같은 색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이 자료는 회사의 자산이 되는 중요한 기밀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런 자료가 부족해 물감을 섞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색이 되고 만다. 눈으로 보기에는 비슷해보이지만 물감이 마른 후 영화를 상영하면 색감의 차이가 크게 차이 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이런 부분에서 능력 차이가 없다. 약 1600만 가지나 되는 엄청난 종류의 색이지만 이들 색은 각각 8비트로 구성된 RGB의 비율로 정확하게 수치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 비율만 지정하면 누구나 똑 같은 색을 만들 수 있다. 과거에는 전문가가 측량 도구로 물감의 비율을 조절하면서 물감을 섞어 원하는 색을 만들고, 사람들이 손으로 원화에 색을 칠해야 했던 작업이다. 그러나 이제는 포토샵에서 RGB값에 0~255 사이의 숫자만 적어주면 24비트로 구성된 트루컬러가 언제나 정확하게 만들어지고,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색칠이 완료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는 분명 발전이다. 그렇지만 한 편에서는 이로 인해 낙오되는 부분이 생긴다.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업계의 컬러 작업 직원들은 점차 일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아날로그가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다. 디지털이 생활 속으로 파고든 시기는 디지털 장비인 컴퓨터, 트랜지스터, 전자계산기의 개발부터 계산하면 50년, PC, CD 등이 대다수 국민에게 보급된 시기로 보면 겨우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디지털화가 가져다 준 변화는 혁명 이상이다. 수 십 만 년의 인류 역사 기간이 모두 아날로그로 이루어졌는데 여기에 갑자기 디지털이라는 생활 방식이 추가된 것이다. 디지털 방식의 등장은 인류 역사를 모든 면에서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디지털화의 의미는 이처럼 거창하다. 지금 세대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 놓여있는 셈이다. 물론 이처럼 거대한 변화의 흐름은 형식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근본 개념부터 바꿀 것이다. 직업에 관한 것도 개념부터 바꾸고 있다.
회사로 출퇴근한다는 개념부터 바뀐다. 이전에도 프리랜서나 재택근무가 있었지만 정말 특수한 경우에 속했다. 그렇지만 디지털 직업은 모든 자료와 업무가 전기적 신호로 저장되고 송수신되므로 시공간에 상관 없이 자료 전달이 가능하다. 실질적인 재택근무가 가능해진 것이다. 과거 자유 직업에 가깝던 만화가나 디자이너, 건축 설계사도 원고나 도면을 전달할 때는 회사를 방문해야 했다. 이제는 만화 그림이나 설계 도면 모두 디지털화된 컴퓨터 파일로 저장해 통신으로 전송하면 된다. 내가 쓰는 이 컬럼 역시 과거에는 작가나 편집 담당자가 방문하여 원고를 받아가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PC로 글을 쓰고 전자우편으로 보내면 끝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도 담당자도 서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컬럼이 연재되고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취업 상담 역시 과거에는 상담자와 얼굴을 마주하며 말로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온라인 상에서 얼굴을 보지 않고 글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형식적인 변화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펜으로 쓰던 글을 키보드로 치는 것은 단순한 도구의 변화로 그치지 않는다. 원화에 붓으로 칠하던 색을 포토샵을 이용해 칠하는 것을 색칠 도구의 변화로만 봐서는 안된다. 붓과 연필, 볼펜은 모두 아날로그 도구이므로 붓이 연필로, 연필이 만년필과 볼펜으로 바뀌는 것은 도구의 변화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붓에서 CG로 변화는 개념의 변화가 동반되는 변화다. 근본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색의 개념부터 바뀌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가 자랄 때 배운 색은 빨강 파랑 노랑 물감을 섞어서 만드는 것이며 여기에 검정색과 흰색 물감을 사용했다. 이때 물감의 비율이 1:1이라고 해서 그 중간색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한 색은 팔레트에 조금만 짜고 약한 색 물감을 더 많이 짜넣어야 원하는 중간색이 나온다. 디지털 시대에는 색을 어떻게 볼까? 색의 요소를 RGB로 분석한다. 색의 조합 비율은 진하고 약한 물감의 양이 아니라 1~100% 또는 0~255의 수치 조합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진다고 본다.
물감을 이용할 때는 칠이 거듭될수록 이전 색과 조합되면서 색이 어두워졌다. 칠하는 면은 평면적인 도화지 한 장이 전부였다. 흰색이 가장 중요한 바탕색이며 투명색 개념은 없었다. 디지털 세대는 이전에 칠한 색은 무시되고 새로 선택한 색으로 칠이 된다고 본다. 작업 공간은 여러 장의 종이 층(레이어)이 겹친 것으로 본다. 바탕색은 흰색이 아니라 투명색으로 본다. 물감으로 색을 다루는 사람과 PC로 색을 다루는 사람은 이처럼 색에 대한 개념과 색을 바라보거나 다루는 근본적인 시각부터 다르다.
아날로그 직업과 디지털 직업은 근무 형태, 업무 내용, 형식만 다른 것이 아니라 일의 소재와 주제, 목표를 바라보는 근본 개념부터 차이를 보인다.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로 변환하는 지금 두 형식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본질과 차이, 상호 보완성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아날로그적인 지식과 형식으로 디지털을 다루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날로그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디지털을 바라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디지털로의 변화는 개념의 변화인데도 단순하게 형식이나 도구의 변화로만 바라보는 오류를 범하기에 일하는 과정에서 많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날로그적인 사고를 가질 때 아날로그를 잘 다룰 수 있고, 디지털적인 사고를 가질 때 디지털을 잘 다룰 수 있다. 디지털을 잘 다루고 디지털 관련 직업으로 성공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근본 개념부터 디지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IT 종사자라면 디지털의 개념부터 명확하게 정립하고 디지털적인 사고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