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꽤 먼 과거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First' 등의 사설BBS가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국내에서 통신용 프로그램 개발하기 시작한 1988년을 PC통신의 출발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전에도 PC통신을 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전문가 집단이 아닌 일반인들이 PC통신을 할 수 있는 시기는 1988년부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올해는 PC통신이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지 10년 째가 되는 해다.
10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PC통신은 눈부실 정도로 발전했다.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통신속도도 수 십 배, 수 백 배나 빨라졌으며 통신 프로그램은 더욱 강력하고 편리해졌다. 그러나 컴퓨터의 발전에 따른 이런 발전은 다른 분야에서도 이루어졌다. 게임, 컴퓨터그래픽, 데이터베이스 분야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 달리 PC통신은 오늘날 컴퓨터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로 발전했으며 현재도 가장 많이 주목받는 분야로 성장하고 있다. 그 까닭은 PC통신이 컴퓨터 작업의 한 부분이 아니라 한 나라와 지구촌의 문화를 이끄는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PC통신이 문화발전의 축으로 변모한 이유는 이름 그대로 '통신'을 주제로 하기 때문이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CAD, CAM, 컴퓨터 그래픽, DTP, 프로그램 개발, 하드웨어제작, 데이터베이스는 여전히 전문가들만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PC통신을 제외한 다른 분야는 사용의 편리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라는 점이 PC통신과 다른 점이다. 워드프로세서는 여전히 워드프로세서일 뿐이다. 타자기를 대신해서 문서를 작성해주는 편리한 도구일 뿐이지 한 분야의 문화는 될 수 없다. 워드프로세서나 CAD에는 낭만도 없고, 모임도 없고, 힘도 없다. 국가정책이나 문화정책을 바꾸는 여론도 없고, 의사결정력도 없다.
그러나 PC통신은 수단이면서 문화다. 낭만이 있고, 모임이 있으며, 힘도 있다. 사회 흐름을 바꾸는 강력한 힘을 가진 여론이기도 하고, 의사결정력도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다. PC통신만이 새로운 힘을 가진 강력한 문화가 될 수 있는 까닭은 PC통신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의견의 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혼자만 사용하는 CAD나 워드프로세서, 데이터베이스, 게임과 달리 다른 사람의 존재가 필수적이고 다른 사람과의 의견 교환을 전제로 하는 분야가 PC통신인 까닭이다.
그래서 PC통신의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통신'이며, 사람들은 서로간의 '통신'을 통하여 꿈을 이루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나가는 것이다. 옛날에도 지금도 PC통신은 '둘 이상이 모여 하나 됨으로써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통신1세대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어디까지가 통신1세대인지 뚜렷하게 구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무도 통신1세대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동안의 통신역사를 세대별로 나누면 몇 세대까지 진전되었는지도 구분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통신1세대의 기준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10년이 안 되는 짧은 PC통신의 역사를 내 나름대로 구분하라고 하면 통신1세대와 2세대, 3세대의 세 단계로 나누고 싶다.
통신1세대는 PC통신의 초기에 남들보다 앞서 통신을 시작한 개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세대는 열악한 PC통신 환경을 이겨내고 국내에 PC통신을 정착시킨 세대라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자료를 국내에 보급했으며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컴토크, 인토크, 이야기, 카페, 호롱불과 같은 프로그램이 개발되었으며, 통신의 한글화에 힘썼다.
그렇다면 어느 시대까지 통신1세대에 해당할까? 내 생각으로는 사설BBS와 피박, 개털의 초창기 이용자가 이에 해당한다. 외국의 통신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그 어려움을 함께 나누던 사람들, 그리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통신1세대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이런 면에서 나는 들고양이(Wild Cat)와 텔레가드까지 사용하던 사람들이 통신1세대에 해당한다고 본다.
통신1세대는 열악한 환경과 싸우는 시기였기에 PC통신 안에서만 맴돌던 시기였다. 모든 문화는 PC통신 안에 존재했다. 사설BBS와 케텔, 피박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없었다. 모임을 가져도 컴퓨터와 통신 이야기 외에는 할 얘기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좀더 쉽게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최대의 화두였다. 1200bps 모뎀을 2400bps 모뎀으로 바꾸고 싶은 것이 최대의 소망이었다. 통신1세대의 문화는 컴퓨터를 벗어나지 못한 소수의 문화였으며 PC통신 자체가 목적이었던 문화인 것이다.
카페와 호롱불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PC통신 역사는 통신2세대로 접어든다. 한글 사용에 별 불편이 없으며, 누구나 쉽게 통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롱불이 등장하면서 국내의 사설BBS는 급속도로 팽창했고 PC통신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통신2세대는 PC통신의 보급시기에 통신을 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피씨서브가 천리안으로 바뀌고 케텔이 코텔, 하이텔로 바뀌면서 대형 통신망의 상업화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호롱불, 밀키웨이, 작은 태양, 곰주인 등의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 보급에 힘입어 사설BBS도 양적 팽창을 거듭했다. 컴퓨터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손쉽게 PC통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통신2세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PC통신 문화는 컴퓨터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아틀란티스 광시곡' '피씨툴스님의 우스개' '비서일기' '퇴마록'으로 이어지는 컴퓨터 문단이 만들어지고, 연극, 미술, 음악, 자동차, 등산을 주제로 하는 각종 동아리가 만들어진다. 숱한 모임이 이루어지지만 모임의 주제는 컴퓨터가 아니다. PC통신은 이제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었다. 모뎀의 속도 이야기도 어쩌다 나오는 주변 이야기에 불과하다.
2세대 사람 역시 공통적인 추억을 가지고 있다. 통신2세대의 최대 관심사는 모뎀속도가 아니다. 글자만 사용하는 이들에게 14400bps 속도는 엄청 빠른 속도였다. 다만 비싼 전화비가 여전히 문제였다. 이 시기의 사람은 타자속도를 높이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채팅을 빨리 해야만 여우허리띠와 늑대목도리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방(채팅)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통신2세대는 엄청난 속도로 타자를 치고 글자를 이용해 통신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야기'라는 통신프로그램을 사용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대화방서 이야기 나누고, 만나서 술 마시고, 연애하고 결혼하기 시작했다. 동아리는 연극와 연주회를 무대에 올리고, 답사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탄생했으며, PLAZA 난 등의 게시판을 통하여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방송 프로그램은 PC통신을 통하여 인기 순위를 집계했으며, PC통신을 통하여 각종 제보나 사연을 접수받기 시작했다. 사기꾼이 생겨나고 욕설과 인신공격이 난무했으나 가슴을 물컹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생겨났다.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기뻐하며 PC통신에 푹 빠져들었다. 그렇게 하여 PC통신은 일반 국민들에게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통신2세대는 꽤 오래 지속될 것처럼 보였지만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찾아들면서 새로운 문화를 지닌 통신3세대가 등장했다. 멀티미디어와 인터넷 혁명을 타고 등장한 세대가 통신3세대에 해당한다. 통신2세대와 통신3세대를 구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텍스트 방식으로 명령어를 쳐가면서 통신을 했던 세대는 2세대이며 멀티미디어 방식으로 통신을 하면 3세대인 것이다.
통신3세대는 2세대처럼 명령어를 외울 필요가 없다. 화면에 보이는 아이콘을 다람쥐로 콕콕 찍어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통신2세대처럼 비싼 국제전화비 낭비하면서 외국과 통신할 필요도 없다. 인터넷을 통해서 손쉽게 외국의 호스트에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멀티미디어 통신이 구현된 것도 아니고, 어느 한 순간에 인터넷 혁명이 구현된 것도 아니다. 그럼 어느 시기를 통신3세대의 시작점으로 잡아야 할까? 나우로의 발표시기 전후를 3세대의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우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윈도우 기반에서 멀티미디어를 지원하는 전용접속프로그램으로 발표되었다. 나우로가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통신회사는 멀티미디어 전용 접속프로그램 개발에 뛰어들었으며 멀티미디어 호스트 개발에 뛰어들었다. 천리안은 다윈을 이용한 매직콜로 바뀌었으며, 유니텔은 아예 윈도 기반의 멀티미디어 통신으로 출발했다. 물론 윈도 기반의 멀티미디어 통신은 필수적으로 인터넷의 WWW 접속기능을 동반했다.
현재의 통신인들은 통신3세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문화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들은 또 어떤 문화를 만들고 가꿀 것인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통신3세대는 즐기는 문화로 흐름을 탈 것이란 점이다. 1세대 때 터를 닦고 2세대 때 보급시켰다면 3세대에서는 보급된 문화를 즐길 때에 해당한다.
그래서 현재의 통신인은 사진을 통해서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카메라를 이용해서 실시간으로 화상대화를 하기도 한다. 동영상으로 방송국의 뉴스를 보며, 화려한 사진으로 예쁜 미녀를 감상한다. 노래방IP에 접속해서 원하는 노래 반주에 맞추어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통신3세대의 고민은 하드웨어적인 문제가 아니다. 통신프로그램도 매우 편리해졌다. 이제 이들의 희망은 통신으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소프트웨어의 공급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요즘 들어 각 통신망에는 끊임 없이 저작권 시비가 일고 있으며 불법복제에 관한 단속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모든 변화는 결국 끊임 없이 추구하는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 노력의 과정에 불과하다. PC통신을 통해서, 컴퓨터를 통해서 사람이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PC통신을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PC통신 문화가 꿈꾸는 방향도 인간의 행복에 있다.
행복 추구를 위하여 PC통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사람간의 통신이요, 두 번째는 만남과 일의 성취요, 세 번째는 사랑이다. PC통신이 보급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다람쥐처럼 오가던 길만 오갔으며 만나던 사람만 만났다. 주부는 하루 종일 가족만 바라보며 방만 닦고 살았으며, 남편은 직장 동료 몇 명만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다. 다른 사람과 단절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PC통신을 하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통신하기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과 만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 사귈 수 있다는 점은 PC통신이 지닌 최대의 매력이다. 자료실에서 야한 사진을 받거나 재미있는 우스개 글을 읽는 것은 한 순간의 즐거움이지만 PC통신을 통해 좀더 다양한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인생 전체의 즐거움이 되는 까닭이다.
만남은 그 동안 묻어두었던 꿈을 성취하는 계기가 된다. 가슴에 묻어버렸던 작가의 꿈을 PC통신을 통해 펼치는 주부의 잔잔한 글을 보고, 학생 시절에 꿈꾸던 연극 무대에 올랐던 한 연극동아리의 청년의 눈물을 볼 때 우리는 통신을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수 천 만원의 성금이 모아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PC통신을 통해 사랑을 나눌 수 있음도 안다.
PC통신은 소외되고 단절된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 어린 시절 묻어버렸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준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남을 돕기도 한다. 그래서 10년 전에도 지금도, 또 몇 백년이 흐른 후에도 PC통신의 목표는 만남과 꿈, 사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PC통신을 통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볼 때 '서로를 돕는 일'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