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꿈에 젖은 동리의 불빛.
세월을 적시는 추억만 빛 바랜 처마 끝에
함초롬 달리고.
하늘이 어둑하게 닫히는 날.
내 고향은 언제나 열 살이 되고 만다.
오늘처럼 무섭게 비가 내린 날.
마루에 앉으면 까맣게 뒤덮은 장대비.
아스라히 어둠을 가르며 누군가 달려오고
빛살처럼 커지는 반가움으로 겹쳐지던 큰 형의 얼굴.
지푸라기 끝을 타내리던 빗소리는 아둥아둥 떨어져
돌 섬 앞에 실개천을 만들고.
빗줄기에 떨어진 뒷동산 풀향기 돌돌돌 흘러 앞 산으로 돌아가면
뜨거운 감자를 양손으로 굴리던 내 누이의
맑은 웃음이 자잘히 부서지며 퍼져가는
내 고향은 언제나 열 살이 되고 만다.
천둥소리를 삼켜 보라빛 봉울진 꽃망울과
만지면 물들어 스며드는 정갈한 이슬.
푸른 새벽 안개를 헤치며
하얀 학들이 그림처럼 다시 찾아들고.
가슴 속 스치던 차가운 새벽 공기에
터질 듯 힘찬 깃소리 아침 해를 떠올리는
내 고향은 언제나 열 살이 되고 만다.
누런 황소의 하품이 둑 위에서 조는 뜨거운 여름 한 날.
할머니는 꼬부랑 허리 잡고 내 손 잡고
푸르기만한 산빛을 따라 올라갔다.
서울서 온 손주를 위하여
주먹만한 수박을 자를 때
비 맞아 자라지 못했다며
아득하게 널려진 수박밭을 바라보던 할머니의 슬픈 웃음.
그래서 내 고향은 언제나 열 살이 되고 만다.
아득한 공포 같던 장마는 이미 사라져
하늘이 더욱 넓어진 푸른 날.
썰물 따라 무지개 잡으러 가던 하루가 있었다.
멀리 동네 어귀가 어스름해지고
까닭 모를 눈물이 나 다시 달려오면
어머님의 부름에 산 아래 깔리는
노을 지피던 하얀 연기.
푸르기만한 내 고향의 추억은
언제나 열 살까지 자라다 만다.
드러누워 바라보면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있고.
언제나 아홉 살 누이의 해맑은 미소와
내 손을 붙잡던 할머니가 살아가는 곳.
눈 감으면 환하게 웃는 그리움이 다가서는,
내 고향은 열 살로서 충분하다.